티스토리 뷰

지극히 개인적인 글

떠나보내며.

작자_미상 2020. 8. 27. 01:46


항상 화이팅! 최고의 여사원 아니였습니까?
하시던 그 힘있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자려고 누워, 페이스북을 잠깐 넘겨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 뭐래는거야?? 싶은 글을 봐버렸다.
보고야 말았다. 보지 말껄. 아니 페이스북을 지워버릴껄.

뭐?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아무리봐도 보고 또 봐도 믿겨지지 않는 내용의 글을 읽고 또 읽고 읽고 또 읽던 찰나 이 늦은 시각에 부고 문자가 하나 오면서 아.. 사실이구나, 이거 진짜구나. 그분이 맞구나..

내가 부산에서 살때, 진짜 최악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그쯤. 그때도 페이스북이였다.
퇴사후 이사님이 먼저 페이스북으로 연락주셔서 끊어진 연을 다시 이으셨고, 그리고 오늘 먼저 먼곳으로 가셨다는.. 영원한 안녕 역시 페이스북으로 알게 되었다.
시작도 끝도 페이스북이네.

휴, 괜히 페이스북을 열어가지고.
이런건 전혀 알고싶지않다. 좋은 소식만 볼 수 없나?

부산에서 최악의 나날을 보내던 그쯤 먼저 반갑게 연락주신 반장님. 아니 이제 이사님.
요즘 부산에 있다면서요? 어디에 있어요? 나는 원래 집이 부산이였어- 세상에 알고보니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에 살고 있었네? 아유 정민씨, 내일 시간됩니까? 오랜만에 맥주나 한잔 합시다. 하시던 유쾌한 이사님 ㅎ

당시에 나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듯 위태로운 삶을 버텨가던 중이였었다.
선뜻 네 한잔해요 라고 하기엔... 두려움이 컸다.
나는 더이상 반장님과 함께 근무하던 그때의 반짝이던 내가 아니라는것을 그분이 눈치 챌까 그게 가장 두려웠다.

그냥 - 걔 퇴사하고 완전 망했던데? 그런 소리가 나올까봐.. ㅋㅋㅋㅋ 그때나 지금이나 남눈 무서워 하는건 변하질 않냐. 내인생 내껀데 내리막도 오르막도 다 내몫인데 말야.

처음엔 다음에요- 다음에요- 하면서 미루고 미뤘었다.
힘든 상황도 벅찼지만 그 망할 자존심. 알량한 싸구려 자존심에 뭔가 위와같은 이유로 그분의 기억속에 나는 반짝대던 그때의 나로 남고싶었으니까.

지금의 우울한 나의 모습은 들키지 않고싶었고 타인의 기억속에나마 밝고 의욕적인 모습으로 내가 기억되었으면 했다.

그렇게 거절에 거절을 하다 더이상은 거절하기조차 죄송할 지경까지 가서야, 만난 이사님.

아직도 그날의 이사님이 생생하다.

그때 그분은 참으로 반짝이는 눈을 가지셨고, 의욕적이셨고 목소리엔 자신감이 넘치셨다.
아니 그때가 아니라 내 기억속에 그분은 늘 열정이 넘치셨다.
삼성에서의 마지막 모습도 참 씩씩하셨던것 같다.

반장님, 오랜만예요 잘 지내셨나요? 했더니 세상 유쾌한 웃음으로 악수부터 청하셨다.
그러더니 씩- 웃으시면서 가슴 안주머니에서 새로운 명함이라며 꺼내 주시던게 생각난다.
"이제 이사입니다~"

참 웃기지-
동네에 아는사람하나 없이 외로운 나였는데, 이사님이 같은동네 산다는 이유로, 종종 만나 맥주한잔 하는 것 만으로도 큰 위로가 됐었다.
뭐 말하지 않아도 요즘 내 사업이 잘 풀리지 않는걸 아셨는지 늘 대화의 끝은 희망의 말 이였다.

이사님은 종종 오늘 별 일 없으면 노가리에 맥주나 한잔, 국밥에 소주나 한잔 어때? 라며 방구석에 갇힌 나를 세상으로 꺼내주셨다.
그게 그때 당시 나의 유일한 외출이였던것 같다.

어쩌다 내가 한잔 사겠다면 극구 만류 하시더니 결국 술 한잔을 못사드렸네. 정말 한잔 대접해드리고 싶었는데..

시원한 생맥주 한잔씩 하고 헤어질때면, 동네 골목이 으쓱하다는 이유로 늘 집앞까지 데려다 주셨다.
나도 딸이 있는데 말이야~ 하시면서 종종 꺼내던 딸이야기부터, 아들 이야기를 주로 하셨다.
거제에서 회사 다닐때는 주말부부였는데, 요즘은 같이 사니 참 좋다는 말씀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좋은데 왜그렇게 빨리 가셨는지..

어쨋든 정민씨가 대박 터지는날이 오면 한자리 달라는 이야기가 늘 대화의 마지막이였었다.
장난가득한 이야기지만, 늘 희망만 주셨던 분.

그렇게 지내던 중, 부산에서 내가 더 살다간 우울증으로 내가 죽겠구나 싶어 집 계약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본가로 급히 내려왔고, 우울했던 부산에서의 기억을 더는 상기하고 싶지않아 "부산에서의 모든것"들을 접어 마음속 깊고 깊은곳에 넣어둔채 오늘까지 살았다.
내 도피법. 일방적 차단.

나는 차츰 가족들 옆에서 안정을 찾았고, 이사님께도 몇달이 지난 후에야 본가로 내려왔다, 그렇게 됐다 라는 말을 전했다. 그게 끝이다.

지금 생각하니 참 나도 이기적이긴 하다.
엎어지면 코닿읗 거리에 산다고 좋다고 위로가 된다 마음이 든든하다 했으면서, 내가 죽겠으니 온다 간다 인사 없이 받기만 받고 떠나왔네.

나는 정말 다시 만나 맥주 한잔 할 수 있을꺼라 생각했다.
좋은날 좋은곳에서 사실 그때 저 진짜 힘들었었거덩요~ 라면서 뭐 응석아닌 응석도 부리고 뭐 정말 나는 그런날이 가까운 시일내에 올꺼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힘들었던 그때를 잊기위해 아니 나를 치유하기위해 참 바쁘게 살았고, 살았다. 정말 모든것은 내가 마음먹기에따라 달랐고, 시간은 역시 약이 맞았다.
흔들리는 내 자신위에 세운 모래성을 무너트리고, 새로이 단단한 내 자신을 쌓는 과정속에서 다시 조금씩 일상을 회복했고, 새로이 사회생활도 시작했다.
애써 숨기려 했던 부산에서의 힘들었던 시간들은 애쓰지 않아도 떠오르지 않게 되었고, 그렇게 그냥 자연스레 새로운 기억들이 과거를 덮었고 새로 주어진 하루는 그저 바쁘고 즐겁고 감사하기만 한채 - 오늘까지 왔다.

시간은 나를 치유해 줬지만, 시간은 또한 모든것을 기다려 주지 않는구나.

오늘, 부고를 보고서 나는 처음으로 가슴깊은데 구겨 넣은 우울했던 그때의 나를 떠올렸다.
우울한 나를 꺼내야만 감사했던 이사님도 떠오르니까..

딱 오늘만 우울한 나를 꺼내, 빛나던 이사님을 기억하려 한다.

이사님은 알고 계실까? 그 당시 내 유일한 외출은 이사님과 동네 선술집에서 만나던 날들 뿐이였다는것을.
이사님껜 단순한 술한잔 일지라도, 나에겐 이사님의 뜨거운 열정을 느끼는것 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는 것을?

도전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그 의욕적인 목소리며, 그 반짝이던 눈빛도 너무 생생한데 뭐가 그렇게 급하셔서 이리 서둘러 가셨는지..

아직 하고싶은일도, 해야 할 일도 많으신거 다 아는데..

세상이 참 그렇다, 못되고 이기적인 사람들은 내버려두고 빛나는 눈과 열정적인 심장을 가진 이는 이렇게 급히 데려가버린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매정하게도 데려가 버렸다.

이사님은 그런분이셨다.
모르는채 지나치면 끝일 인연도 귀하게 여기셨고,
내가 아는중 가장 열정적인 분이셨고,
그분의 밝고 넘치는 에너지는 늘 주변에 귀감이 되었고..
항상 도전하는.
그분은 "열정" 그냥 열정 그 자체셨다.

부디 그곳에선 게으르고 나태한 삶, 적게 노력해도 큰 성과 얻는 삶이 있길.. 이번생은 너무 애쓰셨으니.. 이제 편히 쉬시길 가슴으로 빌어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20.08.27. 01:43

댓글